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현실주의자가 읽기에 아까운 로망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현실주의자가 읽기에 아까운 로망서양식 과학을 무조건 맹종할 필요는 없지만 어떻게 전 세계를 좌우할 수 있는 파급력을 갖게 됐는지 관찰하고 탐구해 볼 필요는 있다. 관찰하고 탐구하는 것 자체가 학문적 태도다. 신기하고 새로운 현상을 배우고 발견하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많은 사람이 수세기 동안 지식을 쌓는 것, 끊임없이 검증하고 반박하고 새로운 근거를 더하는 것, 내 생각을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그것을 대학에서 배워야 한다. 58개 대학이 그들에게 ‘배운 것’보다 배우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만의 의견을 갖는다는 것의 보람을 일깨워 주기를 바란다. 나를 발견하고 받아들이고 눈을 들어 앞으로 나아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그 즐거움과 괴로움을 우주의 이해에서도, 글쓰기의 이해에서도, 시민교육이나 전자기학, 천체물리학 개론에서도 가르쳐 주기 바란다.어쩔 수 없이 대학을 다녀야 한다면 대학졸업장이라는, 그 한없이 틀에 박힌 문서 하나가 주는 즐거움과 보람을 위해 기꺼이 젊음을 바칠 수 있기를 바란다. 63 – 시적 허용은 허용되지 않는다. 대학에서 배움과 성찰, 낭만을 기대하고 실천하면 바보가 되는 현실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는 자의 낭만이 너무나 태연하고 가식이 없어 놀랍다. 지금보다 취업이 어렵지 않았던 나의 대학생활을 돌아보면 더 치열한 전쟁터에서의 투쟁과 이기심으로 뭉쳐 있는 대학생들. 혼족, 혼밥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그 시절이었기에 삼삼오오 모여 밥을 먹고 강촌으로 MT를 가고 종강파티를 했던 그 시절은 그나마 남아있던 대학이라는 낭만의 부끄러움을 한껏 모은 마지막 축제였다. 그러나 사람이 오르면 내가 추락하는 이 냉엄한 현실에서 그 사회 진출의 출발선에 우뚝 선 출전자들에게 호기심을 잃지 말고 배움의 진수를 잃지 말라는 말은 원칙에 입각한 조언이나 그 무심함이 읽는 이를 슬프게 한다. 석사 이상은 올라가야 효력을 발휘하는 분야가 있다. 그러나 나머지 대부분은 학사로 마친 성취를 갖고 사회에 진출한다. 교양수업으로 천문학 강의를 듣는 이런 평범한 학사과정을 마치려는 이들에게도 이 조언은 과연 도움이 될까-나는 좋아하는 록밴드의 새 앨범이 나올 때마다 언니에게 강제로 들려주며 “좋지? 괜찮지?”를 연발했다. 그러자 음악 취향이 나왔고, 많이 나른한 언니는 어쩔 수 없이 몇 초 듣느냐 마느냐며 “좋다”라고 짧게 한마디 해 수긍해주기도 했다.하지만 내가 그런 비상식적인 일을 몇 년씩 반복하자 어느 날 “그만 좀 해”라며 화를 냈다. 오, 나의 감동은 나만의 것이었어. 내가 <코스모스>를 읽을 때의 모습은 동생이 꽂아준 이어폰을 차마 꺼내지 못한 언니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좋은 작품이고 대단하다는 건 알지만 뭐, 나까지 그렇게 같이 있어야 하나 하는 바로 그 표정 말이다. 칼 세이건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대단한 선동가였다. 85-발칙한 우주 산책 <코스모스>는 과학책이라기보다 과학자들이 쓴 인문학 에세이에 가깝다. 전문 과학자들이 보기에 이 책은 과학 서적보다 멀리 떨어진 칼 세이건의 희망과 꿈이 담긴 한 권의 문학으로 볼 확률이 높다.비이과생에게 이 책은 약간의 어려움을 극복하기만 하면 읽을 수 있는 재미와 흥미가 가득하다. 그러나 그 실체에 비해 <코스모스>라는 책이 다소 과대평가됐다는 데 동의한다.같은 분야에 있는 과학자들이 보기에는 이 책이 다소 펄럭이는(?) 것은 이해하지만, 뭐, 모두가 (본인처럼) 과학자는 아니기 때문이다.부모 중 한 명이 가사와 양육을 맡거나 도우미를 고용하거나 조부모 등 친척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아이 하나를 키우기 어려운 사회. 맞아 현실이 그렇다고 백번 인정해. 그것이 현실이지만 그것이 여성의 문제로 인식되는 것은 슬프다. 직장에서는 그만큼 프로페셔널해야 한다며 가정에서의 의무는 가볍게 여기는 아이러니는 무엇일까.여성들이 남성 중심의 문화에 적응해 나가듯이, ‘직장맘’들이 ‘아이는?’이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과 함께 직장생활을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이들도 여성들, ‘직장맘’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면 좋다. 108-최고의 외계인 육아 부모간-남녀간 분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적어도 남성이 2세를 더 원했다면(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신체적 희생을 필요로 하기 때문) 더욱 그렇다.일터에서의 ‘엄마’ 역할을 하는 것을 트집 잡는 회사와 대부분의 육아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것은 서로 모순이다. 육아의 책임을 여성에게 집중시켰다면 직장에서의 출산 및 육아 복지 혜택이 풍부해야 하고, 직장에서 성별 구분 없이 프로페셔널함을 요구한다면 사회적으로 육아의 책임을 한쪽 성에 중점적으로 요구해서는 안 된다.사실 ‘자녀’는 가족의 일원을 생산하는 가정의 일이고, 사회의 일원을 탄생시키는 사회적 사건이지만 애초에 부모 개인의 선택이다. 이제 모든 육아 관련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는 원인은 모든 육아를 ‘부모’가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육아 관련 사회적 책임의 부재에 있다. 모든 비용과 수고를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은 국가 및 사회가 손대지 않고 코를 푸는 매우 간단한 사회적 비용의 해결 방법이다. 하지만 가끔 육아에 지친 부모들이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없다고 토로하는 외로움에 가끔 혀를 내두를 때가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하면 주변에서 고생이라는 위로의 말만 할 뿐 실제로 도움이 없다는 말은 이런 고생을 처음 보는 남이 도와야 한다는 이상한 전제가 깔려 있다. 그 아이의 양육 후 오는 성취와 보람은 부모가 온전히 차지하지 않을까, 남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여기서 수상함은 출발한다. 연애, 결혼도 상대방에게 ‘원하는 것’을 주입하는 순간 관계가 꼬이듯 상대방에게 OO하길 바라는 이기심은 어디서, 어떻게 기인하는가-이러한 부모의 이기심이 과도하게 발현될 때 사회문제로 대두된다. 나는 그 ‘선택’에 대한 의무와 책임, 그리고 그 이후에 올 행복에 대해 냉정하게 인지해야 이런 사회적 문제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카 바보’라는 말이 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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