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를 야유하는 작품에서 부랑자들이 이처럼 자주 희생되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상대적 부와 특혜에 죄책감을 자극해서가 아니다. 이들이 사회의 그물망에서 벗어난 비가담자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회 비판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층이 아니다. 사회 비판의 타깃이 될 수 있을 뿐이다. 부랑자 살해를 제외하면 두 영화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시대의 병리 현상을 상징하는 젊은 반사회적 사이코가 주인공의 소설을 각색했다는 점, 여성을 학대의 유용한 대상으로 채택했다는 점, 그것이 전부다. 사회를 야유하는 작품에서 부랑자들이 이처럼 자주 희생되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상대적 부와 특혜에 죄책감을 자극해서가 아니다. 이들이 사회의 그물망에서 벗어난 비가담자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회 비판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층이 아니다. 사회 비판의 타깃이 될 수 있을 뿐이다. 부랑자 살해를 제외하면 두 영화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시대의 병리 현상을 상징하는 젊은 반사회적 사이코가 주인공의 소설을 각색했다는 점, 여성을 학대의 유용한 대상으로 채택했다는 점, 그것이 전부다.
1980년대 골드러시와 황금만능주의 분위기는 처음부터 조롱의 대상이 돼 왔다. 문화적으로 당시는 글래머러스함에 대한 환상을 극단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인 허영의 시대였다. 포스트 데이비드 보위, 포스트 펑크, 포스트 성 유토피아를 찾아 클럽에 모인 뉴 로맨틱 아트 추종자들을 생각해 보자. 한편, ‘제대로 된’ 것을 소비하는 데 초미의 관심을 기울인 증권가 여피들을 생각해 보자. 미국에서 이 동전의 양면은 뉴욕의 클럽에서 만났다. 이때는 조롱과 아이러니, 비판을 위한 시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1980년대였던 만큼 그 조롱과 아이러니, 비판은 진지한 양상을 띠었다. 1980년대 골드러시와 황금만능주의 분위기는 처음부터 조롱의 대상이 돼 왔다. 문화적으로 당시는 글래머러스함에 대한 환상을 극단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인 허영의 시대였다. 포스트 데이비드 보위, 포스트 펑크, 포스트 성 유토피아를 찾아 클럽에 모인 뉴 로맨틱 아트 추종자들을 생각해 보자. 한편, ‘제대로 된’ 것을 소비하는 데 초미의 관심을 기울인 증권가 여피들을 생각해 보자. 미국에서 이 동전의 양면은 뉴욕의 클럽에서 만났다. 이때는 조롱과 아이러니, 비판을 위한 시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1980년대였던 만큼 그 조롱과 아이러니, 비판은 진지한 양상을 띠었다.
부유층 아노미와 코카인 중독을 다룬 미국 소설은 이처럼 시대정신을 만났다. 1984년 제이 맥키너리의 브라이트 라이츠, 빅 시티 브라이트 라이트, 빅 시티는 생활정보지의 유행란을 빠짐없이 점검하는 여피 주인공이 클럽 생활에 중독돼 모델 연인에게 차이는 추락 과정을 보여준다. 주인공의 딜레마는 이른 시간의 한 클럽에서 ‘식욕 없는 작자들이 이곳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꽤 괜찮은 장소였다고 말하는 대머리녀’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문제는 화자도 그 입맛 없는 작자들의 축에 속하는가. 소설의 자조적인 어조를 보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머리를 깎은 여성도 같은 문제를 상징하는 존재다. …그녀의 목소리는··· 일렉트릭 면도기를 통해 흐르는 뉴저지가 (주가) 같다.” 부랑자는 예외적으로 희생자로 나오지 않는다. 그는 정신을 차린 탄아가 코피를 흘리고 비틀거리며 이성적 부르주아의 성역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장에 처음 등장한다. 대머리 여자보다 정상적인 여자를 찾기로 하고 돌아가는 그에게 부랑자는 축복을 내린다. 부유층 아노미와 코카인 중독을 다룬 미국 소설은 이처럼 시대정신을 만났다. 1984년 제이 맥키너리의 브라이트 라이츠, 빅 시티 브라이트 라이트, 빅 시티는 생활정보지의 유행란을 빠짐없이 점검하는 여피 주인공이 클럽 생활에 중독돼 모델 연인에게 차이는 추락 과정을 보여준다. 주인공의 딜레마는 이른 시간의 한 클럽에서 ‘식욕 없는 작자들이 이곳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꽤 괜찮은 장소였다고 말하는 대머리녀’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문제는 화자도 그 입맛 없는 작자들의 축에 속하는가. 소설의 자조적인 어조를 보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머리를 깎은 여성도 같은 문제를 상징하는 존재다. …그녀의 목소리는··· 일렉트릭 면도기를 통해 흐르는 뉴저지가 (주가) 같다.” 부랑자는 예외적으로 희생자로 나오지 않는다. 그는 정신을 차린 탄아가 코피를 흘리고 비틀거리며 이성적 부르주아의 성역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장에 처음 등장한다. 대머리 여자보다 정상적인 여자를 찾기로 하고 돌아가는 그에게 부랑자는 축복을 내린다.

브렛 이스턴 엘리스의 데뷔작 레스던 제로 레스던 제로 레스탄 제로는 맥키너리를 따라 코카인에 찌든 방종한 10대의 삶을 청산하고 대학으로 돌아갈지 고민하는 서부의 부잣집 소년을 추적한다. 이곳에서의 조롱은 너무나 어둡고 미묘해서 거의 주인공의 삶을 찬양하는 것 같다. 두 소설 모두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은 채 부유층만 다루고 있다. 그것은 무제한의 욕구충족/자기만족의 아노미를 공들여 묘사하고, 그래서 그것을 (결과적으로) 칭찬한다. 대부분 주인공의 대책 없는 추락을 그렸는데도 이들 소설이 상류층을 동경하는 독자들에게 끝없이 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1988년에는 두 작품 모두 영화화됐지만 스크린 버전은 블랫팩 영화답게 신랄함이 거세되고 있다. 브렛 이스턴 엘리스의 데뷔작 레스던 제로 레스던 제로 레스탄 제로는 맥키너리를 따라 코카인에 찌든 방종한 10대의 삶을 청산하고 대학으로 돌아갈지 고민하는 서부의 부잣집 소년을 추적한다. 이곳에서의 조롱은 너무나 어둡고 미묘해서 거의 주인공의 삶을 찬양하는 것 같다. 두 소설 모두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은 채 부유층만 다루고 있다. 그것은 무제한의 욕구충족/자기만족의 아노미를 공들여 묘사하고, 그래서 그것을 (결과적으로) 칭찬한다. 대부분 주인공의 대책 없는 추락을 그렸는데도 이들 소설이 상류층을 동경하는 독자들에게 끝없이 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1988년에는 두 작품 모두 영화화됐지만 스크린 버전은 블랫팩 영화답게 신랄함이 거세되고 있다.
‘나’의 시대가 무르익으면서 도널드 트럼프, 마거릿 대처, 밀턴 프리드먼 등의 무자비한 자본 논리가 극에 달하자 비판은 점점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올리버 스톤의 월스트리트(1987)는 그 첫 영화로 주인공 괴물, 시장교란자, 1980년대의 전형적인 머니 망고 돈 게코는 탐욕은 선이라는 안티 슬로건을 공공연히 내세운다. 게코 역의 마이클 더글러스는 강인한 턱과 코브라 같은 눈으로 끝없는 그의 일중독증에 희생되는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게코의 또 다른 슬로건은 점심은 무능한 놈들의 몫이다. 게코 철학은 사이버 주식시장의 폭발적인 활황을 맞아 오늘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듯하다. 다음에 나온 <보일러룸>(2000)은 가치 없는 주식을 매도하는 법을 교육시키는 회사에 다니는 판사의 아들을 보여준다. 그곳에서 젊은 주식 트레이더들은 모두 모여 월스트리트를 보며 게코의 말을 따라한다. 클레어 드런(1998)처럼 보일러룸은 비정한 도시생활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라기보다 1980년대에 대한 회고영화 같다. ‘나’의 시대가 무르익으면서 도널드 트럼프, 마거릿 대처, 밀턴 프리드먼 등의 무자비한 자본 논리가 극에 달하자 비판은 점점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올리버 스톤의 월스트리트(1987)는 그 첫 영화로 주인공 괴물, 시장교란자, 1980년대의 전형적인 머니 망고 돈 게코는 탐욕은 선이라는 안티 슬로건을 공공연히 내세운다. 게코 역의 마이클 더글러스는 강인한 턱과 코브라 같은 눈으로 끝없는 그의 일중독증에 희생되는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게코의 또 다른 슬로건은 점심은 무능한 놈들의 몫이다. 게코 철학은 사이버 주식시장의 폭발적인 활황을 맞아 오늘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듯하다. 다음에 나온 <보일러룸>(2000)은 가치 없는 주식을 매도하는 법을 교육시키는 회사에 다니는 판사의 아들을 보여준다. 그곳에서 젊은 주식 트레이더들은 모두 모여 월스트리트를 보며 게코의 말을 따라한다. 클레어 드런(1998)처럼 보일러룸은 비정한 도시생활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라기보다 1980년대에 대한 회고영화 같다.

월스트리트가 개봉한 해 언론인 출신 작가 톰 울프의 허영의 불꽃이 발표됐다. 울프의 목표는 뉴욕의 다양한 사회층 위를 디킨스나 조라에 버금가는 스케일로 탐구하는 것이었다. ‘우주의 지배자’ 셔먼 맥코이는 WASP 주식 중개인으로 메르세데스를 몰고 길을 잘못 들어 브롱크스까지 가게 된다. 거기서 그는 흑인 청년을 죽인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의 인종적 편집증을 제대로 맛보기 위해 이곳에서 방송에 나온 할렘가 주민들의 거친 모습에 대한 울프의 프롤로그 몇 줄을 인용하는 것이 좋다. 그들(WASP)은 그들이 TV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파크가나 피프스 애비뉴, 이스트 세븐티 세컨드 스트리트나 서튼 플레이스에 있는 동업자 라운지에 앉아 폭도들을 보고 경악하며 쇼를 즐길 것이다. 아직도 모르고 있네. 아직도 이 도시가 너의 도시라고 생각해? 20세기 최대의 도시가? 정신차리라고! 돈이 있다고 도시가 당신 것이라고 생각하나?” 브라이언 드 팔마의 영화가 울프의 원작을 제대로 옮기지 못하다가 WASP의 고립성에 대한 보다 간명한 조명 <메트로폴리탄>(1989)이 있다. 거기서 부유층은 수용의 역사적인 밤을 보내게 되니까. 월스트리트가 개봉한 해 언론인 출신 작가 톰 울프의 허영의 불꽃이 발표됐다. 울프의 목표는 뉴욕의 다양한 사회층 위를 디킨스나 조라에 버금가는 스케일로 탐구하는 것이었다. ‘우주의 지배자’ 셔먼 맥코이는 WASP 주식 중개인으로 메르세데스를 몰고 길을 잘못 들어 브롱크스까지 가게 된다. 거기서 그는 흑인 청년을 죽인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의 인종적 편집증을 제대로 맛보기 위해 이곳에서 방송에 나온 할렘가 주민들의 거친 모습에 대한 울프의 프롤로그 몇 줄을 인용하는 것이 좋다. 그들(WASP)은 그들이 TV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파크가나 피프스 애비뉴, 이스트 세븐티 세컨드 스트리트나 서튼 플레이스에 있는 동업자 라운지에 앉아 폭도들을 보고 경악하며 쇼를 즐길 것이다. 아직도 모르고 있네. 아직도 이 도시가 너의 도시라고 생각해? 20세기 최대의 도시가? 정신차리라고! 돈이 있다고 도시가 당신 것이라고 생각하나?” 브라이언 드 팔마의 영화가 울프의 원작을 제대로 옮기지 못하다가 WASP의 고립성에 대한 보다 간명한 조명 <메트로폴리탄>(1989)이 있다. 거기서 부유층은 수용의 역사적인 밤을 보내게 되니까.
1980년대의 이 같은 ‘그들-우리’ 사회 풍자는 20세기 초 대중이 모더니즘 작가들을 혐오 섞인 공포로 몰아넣은 것과 같은 양상이다. 존 케리의 ‘지성인과 대중’은 이를 잘 서술하고 있지만, 인구 증가와 교육의 확산에 따른 대중문화의 등장은 H.G. 웰스, T.S. 엘리엇, F.R. 리비스, W.B. 예이츠, 버지니아 울프와 같은 이른바 고상한 작가들에게 니체적 혐오와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존 케리에 따르면 모더니즘 문학과 문화의 주된 스타일은 바로 대중의 배제였다. 대중의 힘과 지적 능력, 이들이 같은 인간임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케리는 결론을 내리기를 이들 지성인이 깨닫지 못한 것은 대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고 말했다. 대중은 ‘가상적 요소의 총합을 지시하기 위해’ 문학이 만들어낸 관념이었다. 뉴스와 신문, 캔에 담긴 음식(인스턴트 푸드)으로 형성된 이미지였다. 1980년대의 이 같은 ‘그들-우리’ 사회 풍자는 20세기 초 대중이 모더니즘 작가들을 혐오 섞인 공포로 몰아넣은 것과 같은 양상이다. 존 케리의 ‘지성인과 대중’은 이를 잘 서술하고 있지만, 인구 증가와 교육의 확산에 따른 대중문화의 등장은 H.G. 웰스, T.S. 엘리엇, F.R. 리비스, W.B. 예이츠, 버지니아 울프와 같은 이른바 고상한 작가들에게 니체적 혐오와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존 케리에 따르면 모더니즘 문학과 문화의 주된 스타일은 바로 대중의 배제였다. 대중의 힘과 지적 능력, 이들이 같은 인간임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케리는 결론을 내리기를 이들 지성인이 깨닫지 못한 것은 대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고 말했다. 대중은 ‘가상적 요소의 총합을 지시하기 위해’ 문학이 만들어낸 관념이었다. 뉴스와 신문, 캔에 담긴 음식(인스턴트 푸드)으로 형성된 이미지였다.
20세기 내내 문학 속에서 무엇을 소비하는가는 곧 그가 누구인가와 동일시되어 왔다. 브렛 이스턴 엘리스의 소설도 패트릭 베이트먼의 장구한 소비품 목록에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우리가 무엇을 소비하는지도 베이트맨의 한 부분이었다. 셔먼 맥코이, 고든 게코 같은 이름을 모른 채 그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맥코이는 소설 속에서 이름만으로 잠시 등장하고, 게코는 작품 속에서 실제 인물로 등장한다. 지금은 전성기에 이른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그러나 포맷을 넘나드는 이 같은 분방한 인용은 작품을 영화화하는 데 적지 않은 난제로 떠올랐다. 영화는 소설과 달리 대사에만 의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세기 내내 문학 속에서 무엇을 소비하는가는 곧 그가 누구인가와 동일시되어 왔다. 브렛 이스턴 엘리스의 소설도 패트릭 베이트먼의 장구한 소비품 목록에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우리가 무엇을 소비하는지도 베이트맨의 한 부분이었다. 셔먼 맥코이, 고든 게코 같은 이름을 모른 채 그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맥코이는 소설 속에서 이름만으로 잠시 등장하고, 게코는 작품 속에서 실제 인물로 등장한다. 지금은 전성기에 이른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그러나 포맷을 넘나드는 이 같은 분방한 인용은 작품을 영화화하는 데 적지 않은 난제로 떠올랐다. 영화는 소설과 달리 대사에만 의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80년대가 저만치 지나가 버린 것은 할롱에게 열광적인 열기로 가득 찬 엘리스의 원작을 보다 유머러스하게 각색할 여유를 주었다. 그의 베이트맨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훨씬 코믹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다. 크리스찬 베일의 기꺼이 과장된 연기에는 거의 오스틴 파워(1999) 같은 데까지 있다. 그는 1980년대와 같은 방식으로 비현실적이다. 마치 슈퍼맨(1978)의 크리스토퍼 리브처럼. 원작에서 베이트먼의 ‘수준’에 대한 집착은 채워지지 않는 피에 대한 굶주림을 견제하고 전체적인 어조를 조율하는 역할을 하지만, 하롱은 겉보기에 집착하는 1980년대 남자들에 대한 조롱을 영화의 주요 주제로 다루고 있다. 1980년대가 저만치 지나가 버린 것은 할롱에게 열광적인 열기로 가득 찬 엘리스의 원작을 보다 유머러스하게 각색할 여유를 주었다. 그의 베이트맨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훨씬 코믹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다. 크리스찬 베일의 기꺼이 과장된 연기에는 거의 오스틴 파워(1999) 같은 데까지 있다. 그는 1980년대와 같은 방식으로 비현실적이다. 마치 슈퍼맨(1978)의 크리스토퍼 리브처럼. 원작에서 베이트먼의 ‘수준’에 대한 집착은 채워지지 않는 피에 대한 굶주림을 견제하고 전체적인 어조를 조율하는 역할을 하지만, 하롱은 겉보기에 집착하는 1980년대 남자들에 대한 조롱을 영화의 주요 주제로 다루고 있다.
할롱도 외모를 중시했다. 클레어 드런처럼 아메리칸 사이코는 금속성의 차갑고 병적인 단정함, 세련미를 보여준다. 베이트맨의 아파트는 그의 단단한 육체가 돋보이는 검은색과 흰색으로 통일돼 있으며 의식을 치르듯 차례로 사용되는 수많은 바디케어 제품들이 샤워를 하는 동안 내레이션으로 나열돼 있다. 월가라는 극단적으로 남성적인 세계로 나갈 준비를 하는 베이트먼의 미용에 대한 관심은 그야말로 슈퍼-페미닌 바다 같은 치장이 아닌 갑옷을 입은 느낌을 준다. ‘단단한 육체’ 역시 연약한 육체를 조롱하는 일련의 신조어 중 하나다(베이트맨이 다니는 회사 이름은 ‘피어스(pierce:뚫는) & 피어스’다). ‘튼튼한 육체’는 단순히 1980년대판 노틸러스 앤 스테어마스터가 아니라 베이트맨이 찾아야 하는 여자(찌르려는 그의 욕망에 대해 무적인)를 가리키는 베이트맨 자신의 호칭이다. 할롱도 외모를 중시했다. 클레어 드런처럼 아메리칸 사이코는 금속성의 차갑고 병적인 단정함, 세련미를 보여준다. 베이트맨의 아파트는 그의 단단한 육체가 돋보이는 검은색과 흰색으로 통일돼 있으며 의식을 치르듯 차례로 사용되는 수많은 바디케어 제품들이 샤워를 하는 동안 내레이션으로 나열돼 있다. 월가라는 극단적으로 남성적인 세계로 나갈 준비를 하는 베이트먼의 미용에 대한 관심은 그야말로 슈퍼-페미닌 바다 같은 치장이 아닌 갑옷을 입은 느낌을 준다. ‘단단한 육체’ 역시 연약한 육체를 조롱하는 일련의 신조어 중 하나다(베이트맨이 다니는 회사 이름은 ‘피어스(pierce:뚫는) & 피어스’다). ‘튼튼한 육체’는 단순히 1980년대판 노틸러스 앤 스테어마스터가 아니라 베이트맨이 찾아야 하는 여자(찌르려는 그의 욕망에 대해 무적인)를 가리키는 베이트맨 자신의 호칭이다.
할롱은 베이트맨에 대한 동일시를 철저히 막고 있다. 그녀는 베이트맨의 내적인 위기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아메리칸 사이코는 폭력을 줄이고 베이트먼의 매력 없는 측면을 강조했다. 여기서 그는 관심 없는 매춘부에게 자신의 음악 취향을 길게 늘어놓는 지루하고 재수 없는 남자다. 인터뷰에서 밝혔듯 할롱에게 베이트맨은 ‘시대의 광기를 상징하는 상징물’, ‘옷과 음식, 피부, 수준에 끼친 시대의 온갖 병리 현상이 한 인물에게 집중된 경우’다. 할롱은 베이트맨에 대한 동일시를 철저히 막고 있다. 그녀는 베이트맨의 내적인 위기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아메리칸 사이코는 폭력을 줄이고 베이트먼의 매력 없는 측면을 강조했다. 여기서 그는 관심 없는 매춘부에게 자신의 음악 취향을 길게 늘어놓는 지루하고 재수 없는 남자다. 인터뷰에서 밝혔듯 할롱에게 베이트맨은 ‘시대의 광기를 상징하는 상징물’, ‘옷과 음식, 피부, 수준에 끼친 시대의 온갖 병리 현상이 한 인물에게 집중된 경우’다.
이런 접근이 낳은 문제는 원작의 신랄함을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 문화광의 한 사람으로서 감독이 여피 주인공에게 느끼는 경멸이 즉시 감지된다. 영화는 ‘정장을 입은 조직생활자’에 대해 영화 팬들이 일반적으로 느끼는 조소를 함께 하고 있다. 원작에는 없던 뉘앙스다. 많은 사람이 옷과 식당에 집착하는 1980년대의 이런 광기에 문화계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문화광은 그런 광기와 과시욕에 오염되지 않았다고. 이는 원작이 거둔 컬트적 성공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나온 착각이다. 원작 속에 숨어 있는 복잡한 매혹의 근원은 모든 젊은이가 어떤 의미에서 패트릭 베이트먼이라고 가정한 데 있다. 크리스천 베일이 베이트맨 역을 위해 사전 조사를 위해 만난 젊은이들의 이야기로 이를 간과한 제작진의 오판을 느낄 수 있다. 그들 대부분이 아메리칸 사이코를 가장 좋아하는 소설로 꼽았다. 그들은 소설이 그들을 비웃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원작은 실패한 조롱인가? 이런 접근이 낳은 문제는 원작의 신랄함을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 문화광의 한 사람으로서 감독이 여피 주인공에게 느끼는 경멸이 즉시 감지된다. 영화는 ‘정장을 입은 조직생활자’에 대해 영화 팬들이 일반적으로 느끼는 조소를 함께 하고 있다. 원작에는 없던 뉘앙스다. 많은 사람이 옷과 식당에 집착하는 1980년대의 이런 광기에 문화계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문화광은 그런 광기와 과시욕에 오염되지 않았다고. 이는 원작이 거둔 컬트적 성공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나온 착각이다. 원작 속에 숨어 있는 복잡한 매혹의 근원은 모든 젊은이가 어떤 의미에서 패트릭 베이트먼이라고 가정한 데 있다. 크리스천 베일이 베이트맨 역을 위해 사전 조사를 위해 만난 젊은이들의 이야기로 이를 간과한 제작진의 오판을 느낄 수 있다. 그들 대부분이 아메리칸 사이코를 가장 좋아하는 소설로 꼽았다. 그들은 소설이 그들을 비웃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원작은 실패한 조롱인가?
할롱의 작품에 빠진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래 전인 197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조롱과 아이러니, 비판은 영국 펑크록이 최초로 의지한 도구였다. 펑크록의 슬로건은 「장래는 없다」로, 그 스타일은 디킨슨적인 누더기와 섹스 숍에서만 볼 수 있는 가죽의 멍이었다. 이보다 더한 풍자가 있을까? 『시계태엽 오렌지』의 알렉스의 신랄함과 조니 로튼의 광적인 외침은 분명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었고, 대사/가사는 공장행이 그들 대부분의 삶의 종착역임을 깨달은 영국 젊은이들의 불만과 좌절을 표현하고 있었다. 단정하고 정돈된 새천년에는 1970년대에 얼마나 엄청난 청년 군중이 모였는지 되살리기가 쉽지 않지만 축구 경기나 모두족과 로커족의 싸움에 모인 청년들을 그린 필름만 봐도 곧 기억이 돌아올 것이다. 할롱의 작품에 빠진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래 전인 197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조롱과 아이러니, 비판은 영국 펑크록이 최초로 의지한 도구였다. 펑크록의 슬로건은 「장래는 없다」로, 그 스타일은 디킨슨적인 누더기와 섹스 숍에서만 볼 수 있는 가죽의 멍이었다. 이보다 더한 풍자가 있을까? 『시계태엽 오렌지』의 알렉스의 신랄함과 조니 로튼의 광적인 외침은 분명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었고, 대사/가사는 공장행이 그들 대부분의 삶의 종착역임을 깨달은 영국 젊은이들의 불만과 좌절을 표현하고 있었다. 단정하고 정돈된 새천년에는 1970년대에 얼마나 엄청난 청년 군중이 모였는지 되살리기가 쉽지 않지만 축구 경기나 모두족과 로커족의 싸움에 모인 청년들을 그린 필름만 봐도 곧 기억이 돌아올 것이다.
뉴욕에서도 변화는 일어났다. 줄리아니 시장은 유명한 무관용 정책으로 거리에서 극빈자의 흔적을 일소하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 톰 울프의 암울한 제3세계 출신 침입 비전은 한동안 침묵을 지킬 수 있었다. 1980년대는 청년 스타일과 반항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부유층에 대한 매혹과 맞물린 전례 없는 시기였다. 펑크가 난 작가들은 일제히 그들의 주의를 스타일에 돌렸다. 더 페이스 ID 같은 스타일 잡지의 잇따른 창간이 마케팅 회사와 학계의 스타일 하위 문화 연구와 병행됐다. ‘시계태엽 오렌지’를 낳은 테디보이들과 증권거래소를 장악하게 된 애송이 청년들의 연관성이 연구되고 분석됐다. 뉴욕에서도 변화는 일어났다. 줄리아니 시장은 유명한 무관용 정책으로 거리에서 극빈자의 흔적을 일소하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 톰 울프의 암울한 제3세계 출신 침입 비전은 한동안 침묵을 지킬 수 있었다. 1980년대는 청년 스타일과 반항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부유층에 대한 매혹과 맞물린 전례 없는 시기였다. 펑크가 난 작가들은 일제히 그들의 주의를 스타일에 돌렸다. 더 페이스 ID 같은 스타일 잡지의 잇따른 창간이 마케팅 회사와 학계의 스타일 하위 문화 연구와 병행됐다. ‘시계태엽 오렌지’를 낳은 테디보이들과 증권거래소를 장악하게 된 애송이 청년들의 연관성이 연구되고 분석됐다.
도전적이고 자신만만하며 무자비하고 자기중심적인 이들, 무서운 신세대는 곧 영국 저널리즘계를 지배하게 될 포스트 펑크 세대 작가들과 만나 아무것도 숭배하지 않는 신랄한 시니시즘으로 특징지어지는 감각의 시대를 창출했다. 영국의 펑크 목소리는 브렛 엘리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레스 던 제로는 1976년 발표된 엘비스 코스텔로의 앨범 My Aim is True에 수록된 곡에서 제목을 따왔다. ‘My Aim is True’는 당시 ‘뉴 웨이브’로 불렸던 사조를 규정한 앨범인데 코스텔로는 거기에 알렉스의 야유를 섞어 넣었다. 특히 ‘Armed Forces’ 앨범은 버지스의 숨결이 강하게 느껴진다. 도전적이고 자신만만하며 무자비하고 자기중심적인 이들, 무서운 신세대는 곧 영국 저널리즘계를 지배하게 될 포스트 펑크 세대 작가들과 만나 아무것도 숭배하지 않는 신랄한 시니시즘으로 특징지어지는 감각의 시대를 창출했다. 영국의 펑크 목소리는 브렛 엘리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레스 던 제로는 1976년 발표된 엘비스 코스텔로의 앨범 My Aim is True에 수록된 곡에서 제목을 따왔다. ‘My Aim is True’는 당시 ‘뉴 웨이브’로 불렸던 사조를 규정한 앨범인데 코스텔로는 거기에 알렉스의 야유를 섞어 넣었다. 특히 ‘Armed Forces’ 앨범은 버지스의 숨결이 강하게 느껴진다.
한편 미국에서는 깔끔한 토킹 헤드가 흔히 뉴웨이브 그룹으로 여겨졌지만 라디오를 가장 많이 타는 ‘사이코 킬러’는 활동 초기 펑크 시절 나온 곡이었다. 어처구니없고 제멋대로인 음악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지만, 베이트먼은 이 토킹 헤드를 적지 않게 언급한다. 특히 ‘사이코 킬러’의 중간 부분(‘넌 대화를 시작한다/끝나지도 않는 대화를/항상 말하지만/사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말이 막혔다/한 번 말하면 반복할 필요가 없다’)은 베이트먼의 뉴욕 사회생활을 완벽하게 표현해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의 머릿속에 복받치는 생각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싱어 데이비드 번의 노이로제성 음성은 신경을 곤두세우다가 1980년대의 완벽한 비문인 다음 가사에서 비로소 잠잠해진다. ‘우리는 모두 눈먼 허영자들/예의 없는 놈들은 정말 싫다’ 한편 미국에서는 깔끔한 토킹 헤드가 흔히 뉴웨이브 그룹으로 여겨졌지만 라디오를 가장 많이 타는 ‘사이코 킬러’는 활동 초기 펑크 시절 나온 곡이었다. 어처구니없고 제멋대로인 음악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지만, 베이트먼은 이 토킹 헤드를 적지 않게 언급한다. 특히 ‘사이코 킬러’의 중간 부분(‘넌 대화를 시작한다/끝나지도 않는 대화를/항상 말하지만/사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말이 막혔다/한 번 말하면 반복할 필요가 없다’)은 베이트먼의 뉴욕 사회생활을 완벽하게 표현해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의 머릿속에 복받치는 생각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싱어 데이비드 번의 노이로제성 음성은 신경을 곤두세우다가 1980년대의 완벽한 비문인 다음 가사에서 비로소 잠잠해진다. ‘우리는 모두 눈먼 허영자들/예의 없는 놈들은 정말 싫다’
베이트맨은 맛이 간 부자 알렉스다. 그의 머릿속을 채운 목소리는 지혜로운 모범생과 물정을 터득한 비열한 실리주의자의 갈등이다. 목소리는 행인을 죽이라고 하지만 무정부주의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무정부적이다. 엘리스의 목소리는 베이트맨의 목소리와 공범자다. 상표에 대한 긴 나열은 작가 역시 공감하고 있는 절박한 구조 요청이다. 그러나 진정한 조롱은 조롱자가 도덕적으로 우월한 수준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 하지만 주인공과 대책 없이 하나가 된 엘리스는 할롱만큼 작가적 거리를 두지 못한다. 베이트맨은 맛이 간 부자 알렉스다. 그의 머릿속을 채운 목소리는 지혜로운 모범생과 물정을 터득한 비열한 실리주의자의 갈등이다. 목소리는 행인을 죽이라고 하지만 무정부주의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무정부적이다. 엘리스의 목소리는 베이트맨의 목소리와 공범자다. 상표에 대한 긴 나열은 작가 역시 공감하고 있는 절박한 구조 요청이다. 그러나 진정한 조롱은 조롱자가 도덕적으로 우월한 수준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 하지만 주인공과 대책 없이 하나가 된 엘리스는 할롱만큼 작가적 거리를 두지 못한다.
아메리칸 사이코에는 시계태엽 오렌지에 드리운 권위체계의 망령에 해당하는 것이 없다. 영화에 등장하는 유일한 경찰은 이미 행인 2명을 해치운 베이트먼이 경찰차를 향해 총을 쏠 때 다 같이 폭사한다. 할롱은 이 도주 장면을 심슨&브룩하이머 영화처럼 연출해 베이트맨을 무적의 액션 히어로로 만들었다. 절정에서 그는 사무실 가구 뒤에 숨어서 친구에게 전화로 모든 것을 고백하지만, 그건 농담으로 취급될 뿐이다. 할롱이 베이트맨을 공상가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그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원작의 베이트맨도 믿을 수 없는 화자로 유명하기 때문에 할롱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얼마든지 있다. 아메리칸 사이코에는 시계태엽 오렌지에 드리운 권위체계의 망령에 해당하는 것이 없다. 영화에 등장하는 유일한 경찰은 이미 행인 2명을 해치운 베이트먼이 경찰차를 향해 총을 쏠 때 다 같이 폭사한다. 할롱은 이 도주 장면을 심슨&브룩하이머 영화처럼 연출해 베이트맨을 무적의 액션 히어로로 만들었다. 절정에서 그는 사무실 가구 뒤에 숨어서 친구에게 전화로 모든 것을 고백하지만, 그건 농담으로 취급될 뿐이다. 할롱이 베이트맨을 공상가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그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원작의 베이트맨도 믿을 수 없는 화자로 유명하기 때문에 할롱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얼마든지 있다.
알렉스(アレックスは映画暴力)는 폭력 영화를 정부 요원에 의해 ‘강제로’ 소비했다. 눈을 감지 않도록 눈꺼풀이 고정된 채로 조건화를 위한 약을 주사를 맞고. 그 약은 앞으로 그가 어떤 식으로든 폭력을 행사하려고 하면 지금 본 영화가 떠올라 반사적인 구토감을 일으키도록 고안된 것이다. 베이트맨은 폭력 영화를 즐기고 있다. ‘바디 더블'(1984)과 ‘텍사스 전기톱 학살'(1974)이 화면에 등장해 항상 반납해야 하는 비디오가 있다. 어쩌면 베이트맨을 미치게 하는 것은 그의 머릿속에 있는 폭력 영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동의하듯이 1990년대는 1980년대의 연장이었기 때문에 베이트먼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넘치는 분노와 광기를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지도.”SIGHT & SOUND-Nick James (KINO, No. 66, 2000. 08) 알렉스는 폭력 영화를 정부 요원에 의해 “강제적으로” 소비했다. 눈을 감지 않도록 눈꺼풀이 고정된 채로 조건화를 위한 약을 주사를 맞고. 그 약은 앞으로 그가 어떤 식으로든 폭력을 행사하려고 하면 지금 본 영화가 떠올라 반사적인 구토감을 일으키도록 고안된 것이다. 베이트맨은 폭력 영화를 즐기고 있다. ‘바디 더블'(1984)과 ‘텍사스 전기톱 학살'(1974)이 화면에 등장해 항상 반납해야 하는 비디오가 있다. 어쩌면 베이트맨을 미치게 하는 것은 그의 머릿속에 있는 폭력 영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동의하듯이 1990년대는 1980년대의 연장이었기 때문에 베이트먼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넘치는 분노와 광기를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지도.”SIGHT & SOUND-Nick James (KINO, No.66, 2000.08)

